메티스가 우티스로 연성되는 메타노이아.
Written 23 August 2026, on Christopher Nolan’s The Odyssey.
잃어버렸던 목걸이 두개를 고르디우스의 매듭마냥 엉망으로 꼬여있는 상태로 찾아서, 며칠에 걸쳐 그 엉킨 매듭들을 전부 풀어내는 경험을 최근에 하였다. 오디세이도 유사한 내면의 여정을 외부세계로 투사한 것으로 읽힌다. 다중매듭의 망상구조를 어르고 당겨서 풀다보면 위상다양체 같던 응어리들이 빠짐없이 선형적 자기서사로 환원된다. 그 과정에서 매듭을 분석하여 해체할 방법론을 골몰하는 지적 역량이나 기지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단지 지속적 관심과 시간, 그리고 인내력과 평정심이 필요할 뿐이다. 영화는 불교에서 순수, 환생을 상징하는 연꽃을 먹으며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섬에서 보낸 시간을 미뤄왔던 내면의 엉키고 설킨 매듭들과 마주하여 하나하나 풀어내는 과정으로, 그리고 자아의 죽음(ego death)은 그를 위한 필수적인 절차인 것으로 그린다.
기지를 발휘할수록 자기 악행의 거대한 망령들의 폭력과 마주하게 되고, 예언과 섭리의 함정에 얽매여만 가는 오디세우스의 귀향기는 계속되는 도피의 여정이다.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정당한 왕좌와 남편,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회복하려면, 먼저 트로이에서 얻은 트라우마와 수치심을 해소하는 것이 전제이자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영화 전반부의 오디세우스에게는 통쾌한 복수의 화신으로서 귀향할 자격이 없고, 차례로 오만ὕβρις, 아만, 자아를 모두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소 신들의 질서 안으로 복귀하고 정도에 발딛는다. 그 때문에 이타카에 도래하고서도 오디세우스는 먼저 개, 아들, 시종으로부터 한 조각씩 자신의 파편화된 정체성을 회복하며 사회적 자아를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정점이 빈 활시위를 튕기는 장면이고, 마침내 부인과 적들의 눈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심리적인 준비가 끝난 순간 놀란의 오디세우스 서사는 완성된다. 그 이후의 액션은 필연의 수순으로, 절정이라기보단 해소와 종지로 느껴진다. 페넬로페와 석양을 향해 떠나가는 서부극식 결말은 오디세우스가 징집도 도피도 아니고, 부하들의 귀향이나 국운을 책임지는 입장도 아닌 상태에서 죄책감을 승화하고 화해와 용서, 평안을 찾을 여지가 마련된 출정으로 묘사된다. 자유롭고 충만한 마음으로 미지의 미래와 평화로운 죽음을 탐사할 수 있는 오디세이를 마지막에 가서야 진정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설정은 그전까지 그려진 수련과 성찰의 고됨과 치열함을 강조한다.
영화의 다문화적 캐스팅을 둘러싸고 한켠에서는 구설수가 많았는데, 결말에서 그 동기가 짐작이 되었다. 서구문명의 퇴보, 호의와 법질서를 악용하는 침략자들에 대한 응징이 바탕이 되는 문화전쟁이라는 제재는 자칫 백인우월주의와 극우 반이민정서의 도그휘슬로 작용할 여지가 다분하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청동기 문명의 몰락을 초래한 바다에서 온 자들의 정체가 결국 제니아ξενῐ́ᾱ의 사회계약을 파괴하고 다닌 오디세우스 일행이라는 설정과 헬레나가 자신의 이름을 빌어 이뤄진 모든 악행에 사과한다는 설정 역시 그런 오해를 방지하는 장치일 뿐 아니라, 반동적 해석에 대한 적극적인 반박인 것으로 읽힌다. 문명의 퇴보와 몰락이 영화의 진단과 같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자초하는 기제로 재생산된다면, 거짓된 명분으로 가공된 마약과의 전쟁, 대량살상무기와의 전쟁, 테러와의 전쟁, 무역전쟁, 그리고 트로이와의 전쟁으로 대변되는 헌팅턴식 문명의 충돌로 주의를 호도하는 사회체제에 대한 내부적 자기반성이 선행돼야지, 비난의 화살을 외부의 적으로 돌려 분열과 갈등에 기대려는 충동은 원천적으로 무효하고 무능한 접근방식이라는 귀결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연꽃을 먹으며 내면의 매듭을 풀어나간 오디세우스와 같은 우공이산의 반성지명이 우리 사회에도 똑같이 필요하다는 것까지가 영화가 제시하려는 현대적 해석의 범위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