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있지만 신이 없거나, 악의 없지만 구조가 있거나.

Written June–September 2025, on Mary Shelley’s Frankenstein and Ryusuke Hamaguchi’s Evil Does Not Exist.

일원론적, 위계적인 플라톤 식 존재론 구조를 하강하는 서사의 “프랑켄슈타인”과 제목에서부터 탈구조화, 절대권위의 해체, 의미의 유동성을 전제하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우주에서 온 것 마냥 상반되는 철학적 세계관 하에서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초점과 구도로 “악”을 다룬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결말에서 가장 큰 수수께끼는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공격한 동기와 그의 심리상태이다. 영화는 타쿠미를 일관되게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묘사하는데, 예외적으로 그가 타인에게 완력을 쓰는 모습이 딱 한 번 나온다. 글램핑장 설명회에서 앞에 앉은 젊은 남자가 일어서서 분노를 표출하려고 할 때 타쿠미는 빠른 판단과 결단으로 그를 거칠게 잡아끌어 앉히는데, 결말에서도 타쿠미가 분노로 이성을 잃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이성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본다면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해진다. 일단 표층적으로는 타카하시로 인해 사슴이 자극받거나 놀라서 하나가 해를 입을 모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판단 하에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제압했다고 해보자.

영화는 구조적 폭력의 가해와 피해를 상류와 하류의 토폴로지에 비유한다. 그 프레임을 문제의 장면에 적용했을 때, 타쿠미와 타카하시가 있는 곳이 상류, 하나와 사슴이 있는 곳이 하류가 된다. 영화는 하나가 사슴들과 마주칠 때에도, 사슴의 백골 시점에서 타쿠미와 하나를 보여줄 때에도 사람이 높은 쪽, 사슴들이 낮은 쪽에 위치하도록 일관되게 배치한다. 또 하나에 대한 수색이 물이 흘러내려가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을 여러 샷을 통해 정립하고, 숲에서 나오는 타쿠미와 타카하시가 내리막을 걷다가 조금 아래쪽에 있는 하나와 사슴을 발견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 상황에서 관객은 어른들이 하나에게 달려갈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기대하고, 언덕의 공간감은 이를 강화한다. 그런데 타쿠미는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서 관객의 기대에도 물리법칙에도 역류하는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한다.

그렇다면 상징적 층위에서 이 장면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타쿠미는 상류의 일이 하류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억지로 막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사슴이 하나를 공격하는 부자연스러운 역류도, 하류의 일이 상류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말 예외적이고 급진적인 전복 내지 저항을 의미하게 된다.

타카하시는 분명한 선의로 하나에게 달려가려고 하고, 하나 역시 분명한 선의로 모자를 벗으며 사슴에게 다가간 것인데 (타쿠미와 하나의 모자가 “뿔”을 의미하며 그것을 벗을 때 공격의도가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결국 상류와 하류라는 하부구조가 결정짓는 폭력의 지향성 앞에서 그들의 악의 없음은 타쿠미에게도 사슴에게도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못한다. 선의와 이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보편타당한 규범을 따르면서도 얼마든지 악한 결과를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 결과론적 윤리관이 지적하는 의무론적 윤리관의 최대 맹점이고, 영화에서도 계속해서 악의 없는 사소한 악행들의 예시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영화의 제목은 실질적 평등과 사회적 정의를 모색할 때 신과 같은 절대적, 보편적 기준에 의해 규정되는 “프랑켄슈타인” 식의 고전적 악이라는 범주가 얼마나 무용한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상으로서의 악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적 관념으로서의 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제 지표면을 떠나서 고개를 들어 z축을 바라보자.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포함하여 땅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나무들을 보여주는 롱테이크가 영화에 몇 번 나오는데, 이 시점에서 상류와 하류가 어느 쪽인지는 직관적으로 파악이 된다. 바로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으로 폭력이 쏟아져 내릴텐데, 영화는 자연의 시점에서 화면 속 인물들을 비추는 특이한 시점 샷을 여러 번 사용하면서도 나무들이 사람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은 단 한 번도 쓰지 않는다. 관객은 항상 까마득한 하류에서 상류의 나무들을 올려다보고만 있다. 나무들을 문자 그대로의 생태계나 환경으로 해석하든, 아니면 조금 더 일반적인 상부구조 혹은 초월적 관념으로 해석하든 간에 감독이 카메라와 나무들 사이의 일방적인 시각적 관계성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해 보인다. 서늘한 무언의 위협 내지 경고: Acta deos numquam mortalia fallunt; Acta non verba. “나무”들은 우리의 선의도 악의도 참작해 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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